매립과 망각의 역사

근대 개항도시 부산의 역사는 매립의 역사다. 백두대간 말단의 가파른 산세와 협소한 해안지대라는 지리적 특성을 가진 부산은 바다를 메우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도시의 공간을 끊임없이 확장했다. 현재 부산 원도심의 대부분은 불과 150여 년 전에 바다이거나 갈대가 무성한 해안가였다. 중앙동 40계단 인근 건물 초석 형태로 남아있는 석축은 과거 이 땅의 역사를 기억하는 흔적들이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부산의 해안선을 확장하여 새로운 도시공간을 개척했지만, 그 땅 아래에는 잊힌 역사가 수장되어 있다. 부산의 매립과 도시공간의 팽창은 수장과 망각의 역사이기도 하다.

잊힌 이름, 새뛰와 초량 (草梁)

예로부터 부산진성에서 자갈치 일대까지 부산의 원도심과 영도 사이의 해역 일대를 우리말로 ‘새뛰’, ‘샛터’, 한자어로 ‘초량(草梁)’이라고 불렀다.
‘새’와 ‘초(草)’는 해안가의 무성한 갈대숲을 가리키고 ‘뛰’와 ‘터’는 길고 평평한 땅, ‘량(梁)’은 좁은 해역의 길목을 뜻한다. 현재 동구 일대 초량동은 바닷가와 떨어진 동네의 지명으로 남아있지만 원래 초량은 이렇게 부산 원도심의 해안가를 부르는 지명이었다. 영국 해군에서 현지를 탐사하고 1860년 발행한 해도의 이름은 ‘초량해(Tsau-Liang-Hae, 草梁海)’였고 영도를 ‘초량섬(Choragu-Somu)'으로 명기했다. 이에 앞서 1481년 발간한 <신동국여지승람>에 ’초량항은 절영도 안쪽에 있다‘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지금의 남포동과 중앙동 일대를 가리킨다. 17세기 이 지역에 세운 왜관 또한 ’초량왜관’으로 불리는데 지금의 행정 명칭과는 다른 초량의 연원을 알려주고 있다.

부산 센트럴베이?

부산포가 자리 잡은 초량 일대는 해상봉쇄 정책으로 일관했던 조선시대에 유일한 자유무역지대였던 왜관의 근거지이자 동북아 평화협력을 상징하는 조선통신사의 시발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팽창의 전초기지로 개발됐던 부산은 초량 일대에 대규모 매축과 항만과 철도시설을 건설하면서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각지에서 몰려든 귀환 동포와 피난민들의 상흔과 일상을 보듬으며 성장했다.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시기에는 한때 동양 최대의 무역항으로 수많은 사람과 물자들이 오가며 혼종의 문화를 탄생시킨 공간이기도 하다.
도심 외곽으로 건설한 신항으로 항만시설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이 지역에는 또다시 대규모 매립과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센트럴베이’, ‘부산하버시티’라는 무색무취의 생경한 단어들이 이 지역의 새로운 명칭으로 거론되고 있다.

기억과 역사의 성토 <신초량 아카이브>

<초량 아카이브>는 매립과 개발 속에 수장된 부산 원도심의 역사와 기억을 다시 쌓아 올리는 예술적 실험이다.
이 성토작업에는 문학과 공연, 영상과 음악, 그래피티와 설치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스토리랩>, <사운드랩>, <이미지랩>, <하이브리드랩> 등을 통해 다각적이고 창의적인 교류와 협업을 시도할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텍스트로 재구성하는 것에 치중하는 기존 아카이브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장소적 감성을 탐색하고 텍스트와 영상, 사운드와 몸짓, 이미지와 설치 등 다중감각이 교차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대중들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교감을 시도할 것이다.